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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사랑회복수기 회복작 - 내일의 나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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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11-03 15:48 조회5,0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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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때까지 뭐 하셨어요몸에 이상이 왔을 텐데...' 

 그랬다알고 있었다얼마 남지 않았구나.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음 얼마나 좋았을까?

늘 그런 생각을 했다후회와 원망도 많았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치 않은 길로 준비도 없이 가고 있었다.

물론 철저히 혼자였다그게 가장 무서웠다혼자라는 것...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술을 가까이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술을 처음 접한 것은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였다.

얼마나 맛있으면 저렇게 매일 드시지.

중학교 때 소풍 가서 술을 마시다 걸려 기합을 받고 집에 늦게 가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그게 멋있는 줄 알았다.

남보다 조금 더 뛰어야 직성이 풀렸고 술을 마시더라도 양주를 마시고담배를 피우더라도 양담배를 피우던 사춘기 때는 아무도 나를 말릴 수가 없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사춘기 때 '우리는 20살까지만 살자' 라고 친구들과 약속을 하고 어울려 다녔다.

남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무작정 사회에 나온 이들이 대게 그렇듯 서울의 한 술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흥미롭고 재미있고 나를 흥분 시켰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무섭기도 했다때로는 기분이 좋아서,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또는 불확실한 내 미래 때문에 술에 많이 의지했다.

 누구나 그렇듯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30대가 되어서는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이미 내 인생은 직장인간관계금전문제사랑까지 모든 것이 술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경찰서 한 번 가지 않았고 음주운전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가족들도 아무도 없었다.

명절엔 꼬박꼬박 집으로 내려갔고 안부 전화도 자주 드렸고 표현도 자주 했으며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친구들은 날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봤지만 그래도 자주 어울리며 위로도 많이 받았다.

그렇게 지내다 결혼을 하였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렸다.

나름 행복했다. 30대 초반이란 나이에 비해 여유도 있었고...

그러던 중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때 당시엔 무덤덤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충격이 컸던 것 같다.

혼자서 무덤을 찾아뵙고 이야기도 하고 술도 따라드리고 잠도 자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는 말처럼 뒤늦게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20대는 방황으로 가득 찬 10대보다 더 했던 것 같다.

크게 기억에 나는 것이 없다. 항상 갈팡질팡 흥청망청...

그때의 나에게 내일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마음도, 설령 내밀어도 잡아줄 사람도 없었다.

서울의 밤은 언제나 외로웠다집에 들어갔을 때 밀려오는 고독감.

너무나도 싫었다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집에 들어갈 수도잠을 잘 수도 없었다.

첫사랑이 가져온 충격은 심했다. 3년을 만났는데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누군가 말하길 여자는 자기를 길들인 사람을 잊지 못하고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 했다.

잊히지 않는 많은 추억들과 순간들 그리고 많은 사연 속에서 나는 변해갔다.

여자를 만나면서도 이별을 준비하고 몰래 벽을 치고 거리를 둔다.

상처를 주지도 말고 받지도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남이 늘어날수록 이상한 사상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발을 동동거린다나는 비겁한 놈이라고 자격이 없다고 그래서 많이 변하려고 노력했고, 이제는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좀 더 진실하고 표현을 한다.

 마음이란 것은 말하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는 통하지 않는다.

좋아한다싫다고맙다. 매 순간 내 감정을 솔직하면 표현하면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수도 있고 손해도 보지만 후회는 없다.

40대의 사랑이 있을 수 있고 50대의 사랑을 기대한다.

이 넓은 세상에 나를내 마음을 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 혼자 눈을 감고 내 모습을 본다.

내가 뭘 하든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게 편하다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 살자.

살려면 술을 멀리해야 하는데... 명분도 있고 동기부여도 되어 있고...

20대에 야간 산행을 혼자 간 적이 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러 갔다가 죽을 뻔했는데 지금이 그때와 비슷한 것 같다.

정상을 가려했는데 그렇게 해도 늦게 뜨고 길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나보고 안 죽은 것이 다행이라 했으니까.

산행 후 화장실도 겨우 다닐 정도로 보름 동안 고생했었다.

그래도 정상은 갔다 왔는데, 남은 건 무서웠던 기억뿐.

단주의 길은 아직도 보이진 않지만 떨어져도 날개가 있는데 뭐... 그러고보니 설악에서 얻은 게 있구나 싶다.

그건 바로 젊은 날의 겁 없던 '기억'... 그런데 지금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구나 싶고 집이 너무 버겁고 무겁다.

병원 응급실에서의 기억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다정신을 차렸을 땐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술에 취해 뭐가 뭔지 분간을 못했는데 지금까지도 잘 정리가 안 된다.

 그 곳엔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사람커튼 뒤에 있어 보이진 않지만 죽어가는 사람... 받아줄 병원이 없는 사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2주 후에 퇴원하게 되었다누나가 시골에서 요양하며 지내라 해서 내려오게 되었다.

정말 좋았다공기도 물도 지리산도 모든 자연이 나를 반겨주는구나 싶었다.

가족 중에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도움도 많이 받았다.

막대한 빚압류망가진 몸 그냥 조금만 더 있었으면 고통 없이 눈감을 수 있었는데 하나님은 아직 조금 더 살라하신다.

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준비해서 다시 온다.

별짓을 다해봤지만 그럼 내일은 지하실로 들어올거라 했다.

그 곳은 지하1층이 영안실이다문상 많이 다니던 곳인데...

그랬다그땐 그렇게 죽고 싶었다.

누나 집과 엄마 집을 왔다갔다하면서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그렇게 또 유혹에 흔들렸다.

'조금은 괜찮겠지 한 잔 정도는'. 6개월이 지났을 무렵엔 병원도 제대로 가지 않았고 1년째 되는 날 드디어 다시 병원에 갔다.

교수님께서 몸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이 문제라며 정신과에 입원시켰다.

그렇게 정신과와 인연을 맺고 이곳 한사랑과의 인연도 시작되었다.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이렇게라도 살아야되나 그냥 쉬면 안될까?...

하지만 날이 갈수록 조금씩 삶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보다 싶은 게 살 길이 열리는 것 같다.

 삶의 만족도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50대엔 부정적인 일보다는 긍정적인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걱정했던 중년의 위기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많은 것들에 의해 뜻밖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생체 시계도 그렇고 정신적 건강삶의 만족도현대 의학의 힘, 사회의 복지 등에 의해서.

그래서 살고 싶어진다나도 살아보려 한다내일을 계획하려 한다희망도 가져본다.

 

비가 많이 온다무슨 가을 장마가 이렇게도 긴지...

코로나는 내 병원 생활을 연장시켰다경험하지 못한 많은 일들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의 잣대로 세상을 본다.

나는 아플만큼 아파봤고 바닥을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더 떨어질 곳이 있는 것 같다.

첫 발을 내딛었다 생각했는데 아직 신발도 신지 않은 것 같다.

울만큼 울었다 생각했는데도 더 울었고, 울고 나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님 식구들, 소중한 사람들... 

아직 더 살아야 할 이유 다시 시작해야 할 이유내 유일한 증거.

빚은 면책되었고 병원 생활도 괜찮고 건강도 괜찮고...

지옥 같은 고통을 이승에서 이겨내자그리고 승리하자

나중에 아무 먼 훗날 내 무덤에서 웃음 짓자그렇게 살자.

나에게 내일을 주신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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